[칼럼] 예수님이 우리 앞에 오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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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교회)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재림한 예수를 알아 볼 수 있을까? 예수 부활이후,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가 나타나 그들과 함께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는 부활한 예수가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백부장은 예수가 죽고 나서야 “이 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도 예수를 바로 알아 보지 못했는데, 2000년 전 예수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알아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가보면, 금발머리에 코가 오똑하며 눈에 진한 쌍거풀이 있는 백인 예수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을 성화처럼 모셔놓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흑인교회에 가보라. 예수를 백인으로 묘사한 그림은 보지 못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같이 생긴 예수가 흑인교회에 가면 환영을 받겠는가? 마틴루터킹과 비슷한 얼굴을 한 흑인 예수가 문을 두드려야 흑인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알아 볼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지금 이 땅에 온다면,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망과 기대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우리는 분명히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도상에 예수와 함께 오랜동안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두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성찬을 받고 나서야 예수를 알아보는 눈이 뜨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게 하시고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를 알아보게 되리라 믿는다. 단지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말했던 것처럼, 주님을 알고자 하는 수고와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힘써 알고 있는가? 무조건 형통한 복을 주고 병을 보험없이 낫게 해 주며 법을 어기되 걸리지 않고라도 성공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예수로 생각하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인 아닌가? 예수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힘써 알고자 하지 않는다. 예수가 체포된 후, 대제사장과 유대종교인들은 예수를 심문할 때, “네가 누구냐, 네가 무슨 말을 했느냐?”(요 18:19)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예수를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히 예수를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고자 하지 않았고, 진정성을 가지고 예수를 힘써 살펴 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그들 앞에 선 예수를 죽이려고만 했지, 참된 하나님으로써의 예수를 바로 보고 세상에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대제사장과 유대종교인들에게만 나타나겠는가? 지금 예수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해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오히려 재림하실 예수를 세상에 잘못 전하여 진짜 예수가 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예수쟁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만들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와 교회, 목회자와 성도는 꽤 큰 불신을 받고 있다. 목회자는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학력을 위조하며 은밀히 성도를 성추행한 범죄들이 속속히 드러나고 있고, 성도는 교회를 돈세탁이나 하는 환전중개소 또는 물질의 복이나 베풀어 주는 서양 무당집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천국과 세상에 다리가 되어야 할 교회와 신앙의 공동체는 도리어 예수를 잘못 깨닫고 왜곡과 편견을 만들어 불신의 그룹이 되어가고 있다. 당연히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온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그의 오심의 전해지는 것은 보류가 될지도 모른다.

다시 오실 예수를 세상에 온전히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를 힘써 알아야 하고, 더불어 세상을 향한 믿는 자들의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우리 삶의 한 절이라도 예수를 전하는 자의 모습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언제라도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실 그 날을 예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