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기도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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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주기도문)이 중요하다는 건 신앙인이라면 다 압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적은 규모의 예배 또는 교회의 각종 회의나 모임 등을 끝낼 때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주기도문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생각하고, 그 내용 하나하나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 즉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보다는, 모임의 한 순서로 취급해 그냥 형식적으로 주르륵 외우고 말 때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이런 경우 외엔 주기도문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를 모르는 것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담긴 내용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깊은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주기도문의 내용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전에 살펴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중요성은 복음서 자체가 증명합니다. 과연 그런지 마태복음을 깊이 들여다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주기도문을 산상수훈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위치가 특별합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크게 다섯 뭉치로 이뤄져있습니다. 첫번째 뭉치는 팔복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두번째 뭉치에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께서 율법의 참뜻을 정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세번째 뭉치에선 유대교 지도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의 삶을 지적하시고 올바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네번째 뭉치는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째 뭉치에선 말씀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이중 세번째 뭉치에 담겨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정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위치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글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 즉 핵심 주제를 글의 중앙에 두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바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 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적 냄새가 많이 풍겨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이 그 중 한 가지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중괄식 서술 방식입니다. 산상수훈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핵심 내용이 세번째 뭉치에 있다는 걸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유대인의 눈을 가지고 산상수훈에 접근해보겠습니다.

세번째 뭉치의 주제는 외식입니다.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당대 가장 신앙심이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선 이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하는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하다고 꾸짖으십니다. 주님은 이들의 외식적인 삶을 통해, 산상수훈과 같이 금과 같은 가르침을 듣고도 겉과 속이 다르게 산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걸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실한 신앙을 지키는데 암적 요소가 되는 외식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가르침을 산상수훈 정중앙에 두신 겁니다. 그리고 외식의 교훈을 위해 주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3가지 소제를 사용하셨는데, 그 중앙에 기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 전체의 중심에 기도가 자리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것이 산상수훈을 실천하는데 필수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겁니다. 금처럼 귀한 가르침으로 가득한 산상수훈 중에서도 주기도문이 이처럼 스포트 라이트를 받고 있는 겁니다.

성경의 공동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주기도문의 내용에 맞추어 기도 제목들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기도함으로 주님 뜻대로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