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격이라는 이름의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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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바울과 일행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사역을 마친 바울은 일행들로부터 잠시 벗어납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바울의 동역자들은 배로 가는 동안, 바울은 혼자서 걸어가기로 결정한 겁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10마일 정도로 천천히 걸으면 5-6 시간이면 충분이 완주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바나바의 초대로 하나님 나라 사역에 공식적으로 헌신한 이후 바울이 이처럼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걷는 장면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도 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파격’이라고 표현하면 딱 어울릴 그런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 의외의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왜 5-6시간 동안 혼자 걷기로 했는지가 궁금한 겁니다. 파격적 행동으로 얻은 그만큼의 시간이 과연 바울에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딱 한 번 등장하는 장면이라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행전이 담고 있는 바울 삶의 편린들을 모아 깊이 묵상하는 동안 이런 결론에 닿았습니다. 바울이 혼자 있고 싶었구나. 안디옥 교회에서의 사역, 그후 선교 사역에 헌신하는 동안 바울은 늘 누군가와 함께 복수로 살아왔습니다. 또한 사역 중심의 바쁜 삶 속에서 여유를 누릴 시간도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에는 로마까지의 대장정이 놓여있습니다. 다시 눈코 뜰 사이없이 바쁘게 달려가야 할 길 앞에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드로아 항구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바울은 문득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진 것 같습니다.

모처럼 혼자가 된 바울에게 처음 몇 걸음은 낯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혼자의 여정을 즐길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시가 4월 말경이었으니, 낮에 출발해 천천히 걸었다면 저녁 때쯤 앗소에 도착했을 겁니다. 걷는 동안 바울은 평소 눈여겨 보지 못한 사물들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겁니다. 낮에는 파란 하늘도 올려다보고, 바다도 바라보고, 길가에 핀 들꽃들에도 눈길을 주었을 겁니다. 저녁 시간엔 길가에 앉아 서녘으로 떨어지는 태양과 밤하늘을 장식하기 위해 톡톡 무대로 등장하는 별들도 감상했을 겁니다. 이 특별한 시간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었을 겁니다. 이런 고백도 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이처럼 뚜렷하게 느껴지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파격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긴 철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기차에게도 정거장이 필요하듯, 당장 해야 할 것들로 가득해서 잠시 눈을 돌리기도 힘든 우리의 일상도 온전한 쉼이 있는 파격의 공간이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고 굳이 며칠의 시간을 들여 멀리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일상의 레일에서 잠간만 벗어나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동네 산책로에 설치해둔 긴의자로 가서 힘을 뺀채 기대어 앉아 여유론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겁니다. 자신을 묶고 있던 일과 생각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렇게 앉아있다보면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쁨 속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 곁에서 항상 동행해오신 하나님을 만나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게 됨은 가장 특별한 기쁨입니다. 파격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정거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