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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6, 2026
Home 전문가 칼럼 이가희 특파원 제주의 바람으로 쓴 스페인 국민화가 헤수스 수스의 사부곡

[이태분 회장] 제주의 바람으로 쓴 스페인 국민화가 헤수스 수스의 사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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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수스 수스 작가의 부인 이태분여사가 개관식 오프닝을 하고 있다.

거장의 빈자리를 눈물로 채운 이태분 회장의 ‘위대한 동행’

2025년 12월 22일, 제주 성산의 ‘헤수스 수스 미술관’ 개관식 현장에서 붉은 리본이 두 갈래로 잘려 나가는 순간, 축하의 박수보다 더 크게 들려온 건 한 여인의 애절한 흐느낌이었다. 남편 헤수스 수스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100여 점 앞에 선 이태분 회장. 그녀의 떨리는 손끝과 젖은 눈망울은 개관의 기쁨을 넘어, 건강 문제로 끝내 아내의 조국인 한국 땅을 밟지 못한 남편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전시장 전체를 숙연하게 물들였다.

본 기자는 당시 제주도에서 그녀와 1박 2일간 머물며 예술을 향한 집념과 남편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가까이서 기록했다. 그러나 개관식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그녀는 스페인에 홀로 남아 투병 중인 남편을 보살피기 위해 서둘러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스페인을 오가는 전화 인터뷰로 이어졌다. 제주에서의 뜨거웠던 대면 인터뷰와 국경을 넘나든 수차례의 통화 끝에 완성된 이 기록은, 한 예술가의 생애를 지켜낸 뮤즈이자 동반자인 이태분 회장의 숭고한 사부곡(思夫曲)이다.

하멜의 우연을 예술의 필연으로 바꾼 ‘운명의 정착’

제주 성산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국적인 건축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국 최초의 스페인 미술관, ‘헤수스 수스 미술관’이다. 1653년 하멜의 입도가 뜻하지 않은 우연이었다면, 2025년 수스의 미술관은 아내 이태분 회장의 헌신과 작가의 의지가 만들어낸 필연적 선택이다.

바르셀로나 대학교에서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며 스페인 현대미술의 자존심으로 불려온 헤수스 수스 몬따예스(Jesús Sus Montañés)의 작품 100여 점이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이는 단순한 전시관의 개관을 넘어, 유럽의 태양과 제주의 바람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마주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미술관 입구에 새겨진 “유럽이 제주와 다시 연결되는 두 번째 문장”이라는 글귀는, 400여 년 전 하멜의 기록이 이제는 예술을 통한 깊은 대화로 진화했음을 선언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22일 제주시 오등동에 문을 연 헤수스 수스 미술관의 개관 커팅식.

붉은 리본 뒤에 숨겨진 사부곡: “그가 여기 있었다면”

개관식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이태분 회장이 가위를 들었다. 하지만 리본이 잘려 나가는 순간,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개관식이었지만, 옆자리에는 함께 있어야 할 남편 헤수스 수스가 없었다. 건강 악화로 인해 장거리 비행이 불가능해진 거장은 끝내 스페인에 남아야 했다.

이 회장은 마이크를 잡고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내 남편, 헤수스 수스가 가장 오고 싶어 했던 이 자리에 그가 없습니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자, 현장에 있던 내빈들과 관람객들도 약속이나 한 듯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아쉬움의 눈물이 아니라, 타국에서 평생을 보낸 한국인 여성으로서 병상에 누운 남편의 예술적 유산을 이곳 제주에 미술관으로 열기까지 수많은 스토리에 대한 뜨거운 응답이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눈물에서 거장의 공백이 아닌, 그 공백을 채우고도 남을 지극한 사랑의 힘을 보았다.

붓끝에 머문 바르셀로나의 빛, 그 영적 기원을 묻다

거장의 화폭은 강렬한 원색의 함성과 리듬감 넘치는 경쾌한 붓질로 가득하다. 본 기자가 이 회장에게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공기를 회상하는 듯했다. “수스에게 빛은 단순한 물리적 파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는 온기이자, 숨 쉬는 생명력 그 자체였죠.”

작가가 스페인의 병상에서 제주 개관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영혼이 가장 먼저 떠올렸을 ‘빛’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회장은 그것이 지중해의 찬란한 태양인 동시에, 아내의 나라 한국의 은은한 여명이었을 것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수스의 작품 속에는 카니발의 소란스러운 환희, 시장통의 투박한 북적임, 그리고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소리가 역동적으로 포착되어 있다.

캔버스를 수놓은 그 강렬한 색채들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 온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Humanity)’을 대변한다. 특히 ‘비 오는 날에 신호등 앞(2015)’이나 ‘테라스 위에 엄마와 딸(2013)’ 같은 작품들은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이 가진 고귀함을 일깨워주며 보는 이의 심장 박동을 조율한다. 비록 거장은 제주의 흙을 밟지 못했으나, 그가 창조해 낸 화폭 속의 빛들은 이미 성산의 노을과 하나가 되어 타오르며 관객들에게 뜨거운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작품에 몰입 중인 헤수스 수스 작가( 출처 이태분 회장)

‘평범함’이라는 이름의 성소: 서민의 삶을 신화로 만드는 힘

수스의 예술은 거창한 권력이나 화려한 귀족의 삶을 탐하지 않는다. 그의 캔버스에는 활기찬 삶의 현장인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인들,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타며 함성을 내지르는 아이들, 그리고 비 오는 거리에서 알록달록한 우산을 쓰고 신호를 기다리는 군중이 주인공으로 서 있다. 작가는 늘 “평범한 순간들이 가진 소중함”을 포착해 내는 것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사명으로 여겼다. 이 회장은 남편이 화려한 기교나 차가운 미학 보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따뜻한 그림을 선호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작고 소박한 행복을 발견하고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남편의 영혼을 향한 깊은 존경이 묻어났다.

이러한 수스의 휴머니즘은 한국인 특유의 ‘정(情)’과 묘하게 맞닿아 관람객의 심장을 두드린다. 그녀는 작품 하나하나 앞에서 설명했다. 그의 화폭은 일상의 평범함에 가장 잘 어울리는 톤 다운된 파스텔 톤과 리듬감 넘치는 생동감 있는 색채의 조화는 관람객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넘어 깊은 정서적 정화와 심리적 위안을 제공한다. 비록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온 이방인의 붓질이지만, 그가 포착해 낸 일상의 찰나들은 제주라는 공간에서 한국적 정서와 완벽하게 공명한다.

투병 중에도 놓지 않은 붓, 그리고 조국을 향한 그리움

헤수스 수스 작가는 현재 중한 병환으로 인해 붓을 쥐기조차 힘겨운 상태다. 하지만 그의 영혼만은 아내의 나라 한국을 향해 있었다. 작품 100여 점이 제주에 있으니,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회장은 다시 한번 목이 메었다. “그는 마치 자식을 멀리 보내는 부모처럼 작품 하나하나를 쓰다듬었습니다. ‘태분, 내 그림들이 당신의 나라에서 사람들을 웃게 했으면 좋겠어’라고 하더군요.”

그가 흘린 침묵의 눈물에는 타국에서 보낸 40여 년의 세월과 이제는 자신의 분신들을 아내의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이 미술관은 예술적 마침표인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를 온전히 기억하도록 만드는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비록 몸은 스페인에 남았지만, 그의 예술적 혼은 이제 제주의 흙을 밟으며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한류의 새로운 문법: ‘수출’을 넘어선 ‘수용’의 미학

이태분 회장은 스페인 아라곤주에서 오랜 세월 한인회장을 지내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민간 외교관이다. K-콘텐츠가 세계의 주류로 우뚝 서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포용력으로 스페인 현지 사회의 깊은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한류의 정의를 새롭게 써 내려간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한국의 가치를 유럽에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르셀로나 대학교 교수이자 스페인 현대미술의 거장인 남편 헤수스 수스의 수준 높은 예술 세계를 조국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양방향 문화적 가교를 완성하고자 했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화란 결코 일방적인 주입이나 수출이 아니라, 서로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 속에 깃든 삶의 온기를 공유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녀의 집념과 철학이 없었다면, 스페인 정부와 유럽 미술계의 자부심이라 불리는 수스의 작품 100여 점이 제주라는 낯선 땅에 미술관으로 정착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수출’의 기세만큼이나, 타국의 깊이 있는 예술적 유산을 우리 것으로 포용하고 수용하는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대국이 지녀야 할 덕목임을 그녀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제 제주는 그녀의 눈물과 노력을 자양분 삼아, 유럽과 한국이 예술로 숨 쉬는 새로운 문화 영토로 거듭났다.

‘수스 리(Sus Lee)’라는 이름의 무게: 아내와 기획자 사이의 고뇌

미술관 개관식에서 컷팅을 하던 순간, 이 회장은 아내로서의 슬픔과 기획자로서의 자부심 사이에서 치열하게 흔들렸다. 40여 년 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낯선 땅에서 수스를 만났을 때부터, 그의 뮤즈가 되고 비평가가 되어 함께 걸어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스 리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거장의 그늘에 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향해 뻗는 손길이 되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이 미술관은 남편과 함께 써 내려간 40년의 연서(戀書)이자, 그 연서의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다. 개관식에서 흘린 그녀의 눈물은 고통이 아니라, 두 영혼이 예술로 하나 되어 이룩한 장엄한 승리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었다. 이제 그녀는 아픈 남편의 손을 대신하여, 제주의 사람들에게 지중해의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수호자가 되었다.

미래를 향한 약속: 성산의 노을 아래서 다시 만날 그날

비록 지금은 작가님이 병상에 계시지만, 이 미술관은 두 분의 영원한 약속과도 같다. 예술은 반복되지 않고 깊어지는 역사의 증거라는 이 회장의 말처럼, 수스의 예술은 이제 제주에서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갈 것이다.

이태분 회장이 흘린 눈물의 무게를 시카고 한국일보 독자들은 직감한다. 그것은 병상의 남편을 향한 지독한 순애보이자 고국을 향한 멈추지 않는 향수, 그리고 예술로 승화시킨 생의 장엄한 결실이다. 이제 기도는 하나로 모인다. 헤수스 수스 작가가 기적처럼 일어나 제주의 노을 아래서 아내에게 “태분, 당신의 나라가 참 아름답군”이라며 미소 지을 그날이다. 그들 부부의 삶 자체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앳지’ 있고 감동적인 걸작이었음을 부정할 이는 없다.

시카고부터 남미, 그리고 세계의 우리 동포들은 이 숭고한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제주에 뿌리 내린 이 예술의 정원은 우리 한인 사회의 거대한 자긍심으로 남을 것이다. 이태분 회장의 사랑과 수스의 예술이 멈추지 않고 영원히 박동하기를, 시카고 한국일보는 끝까지 지켜보며 응원할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성산 일출봉 너머로 지는 노을이 수스의 그림 속 색채와 닮아 있음을 느꼈다. 예술은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어떤 언어의 장벽도, 물리적인 거리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이태분 회장의 눈물을 통해 다시금 확인했다. 이번 주말, 헤수스 수스 미술관으로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이 따뜻한 ‘일상의 신화’ 속으로 걸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특파원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