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1세대의 땀과 역사를 기억하라!”
메디슨가에서 일군 이민 개척사… ‘로열 뷰티’의 성공 신화
미용재료상협회·황해도민회·한인회로 이어진 봉사의 발자취
일자리 주선부터 장학 지원까지… 탈북민 정착 지원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한인 경제와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
[편집자주] 본지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열여섯 번째 인물은 시카고 한인회 이사장, 미중서부 이북도민연합회 및 황해도민회 회장, 시카고한인미용재료상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김주진 회장이다. 해방과 전쟁, 피란, 가난과 이민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은 그는 시카고 미용재료업계에 뿌리내리며 한인 경제의 한 축을 지켰고, 여러 단체를 통해 탈북민 정착과 한인사회 봉사에 힘써왔다. 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 잃어버린 고향을 마음에 품고 또 다른 이들의 손을 잡아준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김주진 회장의 90여 년 인생을 지탱해 온 뿌리는 가문 대대로 이어진 신앙과 이웃을 향한 섬김이었다. 193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명망 높은 교육자이자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올곧게 자랐다.
특히 집안의 뿌리 깊은 기독교 신앙은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키웠다. 김 회장의 증조할아버지는 황해도 성화교회 설립에 동참한 초창기 기독교인이었다. 동네에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굶주린 이웃을 보면 몰래 쌀을 가져다주던 증조할아버지의 일화는 그에게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됐다.
그러나 평온했던 어린 시절은 해방과 함께 찾아온 혼란 속에서 무너졌다. 해방 직후 마을 곳곳은 이념의 대립과 사적 보복이 뒤섞인 혼란의 시간이었다. 정직한 교육자로 살아온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보복 대상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김 회장은 “해방 직후 아버지를 잃었다”며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훗날 어머니가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를 잃은 뒤 어머니 최화영 여사는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해졌다. 김 회장은 어머니 최화영 여사를 “연설을 잘하고 추진력과 판단력이 빠른 분”으로 기억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서북청년단 총무로 활동했던 어머니는 훗날 국회의원 찬조연설을 다닐 만큼 활동적이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행동하는 여성이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북쪽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북쪽 체제에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했고, 38선 왕래가 완전히 막히기 전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올 준비를 했다. 모녀는 안내인을 구해 위험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향했다. 해주를 떠난 이들이 닿은 곳은 6·25전쟁 이전까지 38선 이남에 속했던 황해도 옹진이었다.
남쪽에 도착한 뒤 마주한 풍경은 어린 김주진에게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술집마다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며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본 그는 어머니에게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근본적인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북에 가서는 못 산다”고 단호히 말했다. 고향을 뒤로한 모녀는 그렇게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 교복이 없어 울던 학생
이후 1950년 6·25전쟁은 다시 김 회장의 삶을 뒤흔들었다. 옹진이 위태로워지자, 모녀는 국군들과 함께 후퇴해야 했다. 총알이 옆을 지나가고 폭격이 이어지는 피란길이었다. 피란민이 너무 많아 배에 오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모녀는 한때 떨어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남쪽에 도착한 뒤 사람을 보내 딸을 찾게 했고, 김 회장은 안내인을 따라 인천에 당도해 극적으로 어머니와 다시 만났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기억도 생생하다. 연합군의 군함이 바다를 메우고 포탄이 하늘을 가르던 날, 김 회장은 어머니와 함께 산 위로 피신했다. 땅이 흔들리는 포격 속에서 작은 태극기를 깔고 앉아 숨을 죽였던 장면은 어린 소녀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전쟁을 피해 당도한 대구 피란 시절은 지독한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며칠씩 굶는 날도 있었지만, 김 회장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피란 통에 교복을 마련하지 못해 사복을 입고 등교하던 날, 선도부원들은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제지했다.
김 회장은 “교복이 없어서 못 들어가고 많이 울었다”며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해서 겨우 들어가긴 했지만,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도부 학생들에게 맞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가난은 계속됐지만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학에 재질이 있어 영어를 잘했고, 어려운 피란 생활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훗날 그는 경북대학교 농예화학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낼 수 없었다. 김 회장은 “대학 합격은 했는데 돈이 없어 등록금을 제때 못 냈다”며 “학교에 직접 찾아가 울며 사정한 끝에 청강생으로 허락받아 2년 동안 공부했다. 지금 같으면 어려웠겠지만, 당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상했다. 농예화학을 택한 것은 손에 기술이 남고, 화학과 약품 등 여러 분야로 나갈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 신앙으로 세운 가정
경북대에서 공부한 뒤 김 회장은 원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원주 고등기술학교 강사로 일하며 타이핑(타자)과 미용 학술을 가르쳤고, 미군 부대에서 타이핑 업무도 겸했다. 당시 타이핑은 취업에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기술이었다. 김 회장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일자리까지 연결해 주기 위해 애썼다.
원주는 김 회장이 전쟁 이후 스스로 삶을 일구며 자립의 길을 찾아간 곳이었다. 동시에 그곳은 평생의 동반자인 고(故) 김창극 장로를 만난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김 장로는 당시 원주 군부대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자,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둔 공통점이 있었다. 김 회장은 “남편이 굉장히 진실하고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남편 김창극 장로 역시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둔 사람이었다. 함경도 출신인 그는 월남할 당시 목숨을 걸고 기독교인 14명을 직접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평생 통일을 소원하며 공산당에 의해 무너진 이북의 교회 제단을 다시 세우고, 희생된 성가대원들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자 책임으로 여겼다.
김 회장은 “남편이 늘 통일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면서, 고향에 가 교회도 재건하고 희생된 성가대원들의 비석도 세워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23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김 회장은 남편이 다 이루지 못한 그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그에게 신앙은 모진 고난을 견디게 한 버팀목이었고, 훗날 낯선 땅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게 한 이정표가 됐다.
◇ 메디슨 거리에서의 도전
김 회장의 미국 이민은 남편 김창극 장로의 출장에서 시작됐다. 군 장교 제대 후 서울의 무역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괌 출장길에 시카고를 경유하게 됐다. 김 회장은 “당시 남편이 오헤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심기영 변호사와의 인연은 우리 가족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발전 가능성과 영주권 취득 기회를 전해 들은 남편은 고심 끝에 미국에 머물며 영주권을 신청했다. 이후 브로드웨이 식품점을 공동 운영하며 기반을 잡은 남편은 영주권을 받은 뒤 김 회장과 딸을 초청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곧바로 미국행을 결정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인연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고, 낯선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결국 김 회장은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1973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의 날이었다. 김 회장은 하늘을 가르는 공군기들을 보며 한국을 떠났다. 김 회장은 “국군의 날 행사를 보면서 울면서 왔다”며 “한국을 떠나는 마음이 무척 서글펐다”고 회상했다.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아메리칸드림이 아니라 이민의 현실이었다. 남편이 마련해 둔 것은 침대 하나뿐인 빈방이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미국에 오기 전 이민자 소양교육에서 세탁소, 장사, 홈서비스 같은 생업 선택지를 들은 김 회장은 가발·미용재료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 도착 다음 날, 바로 가게 자리를 보러 나선 시카고 메디슨 거리에서 첫 시련을 겪었다. 김 회장은 “가게를 보러 가던 길에 지나가던 흑인에게 가방을 소매치기당했다”며 “돈도 신분증도 다 없어져 서류를 다시 만드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큰 충격이었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당시 메디슨 거리는 1968년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폭동의 여파로 치안이 극도로 악화돼, 주변 한인들조차 만류하던 거친 지역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자본이 부족한 이민자가 파고들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신분증 재발급을 기다리며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약 3개월 동안 일을 배우며 장사의 흐름을 익혔고, 이후 1970년대 중반 71가에 ‘로열 뷰티 서플라이(Royal Beauty Supply)’의 문을 열었다.
◇ 이민자의 땀으로 세운 가게
미용재료업은 당시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진출한 업종이었다. 손님은 주로 흑인 커뮤니티였다. 김 회장은 당시 머리 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에게 머리를 감고 손질하는 방법부터 가발 착용과 스타일링까지 직접 알려주며 신뢰를 쌓았다.
김 회장은 “한인들이 이 업종을 통해 흑인 사회의 미용문화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며 “손님들에게 가발을 씌워주고,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주며 관계를 쌓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흑인 고객들에게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며 “한인들이 흑인 미용문화 발전에 도움을 많이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사는 물건만 파는 일이 아니었다. 지역사회와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김 회장은 흑인 교회에도 출석하며 헌금과 기부를 했다. 가게 건물을 사려 할 때 은행 대출이 쉽지 않았지만, 고객이었던 지역 인사들과의 관계를 통해 길을 열기도 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부부는 건물을 매입하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남편 김 장로의 헌신도 컸다. 그는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가게로 와서 일을 도왔다. 매장이 번창해 확장 이전할 때마다 남편은 직접 연장을 들고 진열대를 짜맞추고 내부를 고쳤다. 부부가 함께 일군 로열 뷰티는 전쟁과 피란을 겪은 부부가 미국 땅에서 다시 세운 삶의 터전이었다.
김 회장의 리더십은 개인 사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2007년,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카고한인미용재료상협회 회장으로 당당히 선출됐다. 여성이라는 편견을 깨고 현장에서 다져진 카리스마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90세가 넘은 지금도 고문으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미용재료업은 당시 한인 경제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흑인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뷰티 서플라이 사업을 통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자녀들을 키워냈다. 동시에 한·흑 관계의 최전선에 서야 했다. 오해와 갈등도 있었고, 문화 차이도 컸다.
김 회장은 그 현장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한인 업주들이 서로 돕고, 흑인 커뮤니티 고객을 존중하고, 지역사회와 관계를 쌓아야 사업체가 오래간다고 깨달았다. 김 회장은 “비즈니스는 물건만 파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알고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잃어버린 고향을 품다
김 회장의 한인사회 봉사는 황해도민회 활동으로 본격화됐다. 2005년 4월경 황해도민회장 제안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에게 도민회 활동은 단순한 친목이 아니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서로의 기억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리였다.
그는 황해도민회장을 맡았고, 이후 미중서부 이북도민회와 이북5도민연합회 활동으로 이어갔다. 시카고 한인회에서도 이사장 등 여러 직책을 맡으며 한인사회 봉사에 참여했다. 2020년에는 제14회 세계한인의 날 유공 정부포상자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김 회장에게 봉사는 가문의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돌본 증조할아버지, 강인했던 부모님, 북한 교회 재건을 꿈꾸던 남편의 삶이 모두 그의 이정표가 됐다.
그 마음은 탈북민 정착 지원으로도 이어졌다. 김 회장에게 탈북민들은 고향을 잃은 또 다른 이웃이자 형제였다. 그는 탈북민들이 시카고에 도착하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일자리를 주선했으며, 사재로 장학금을 주고 대학을 졸업시키기도 했다. 김 회장은 “도와준 아이가 대학을 나와 사회인으로 당당히 살아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쁘다”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베푼 호의가 상처로 돌아오는 힘든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보다, 어려운 이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탈북민 지원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는 일이자 통일로 가는 작은 걸음이었다.
◇ 대를 잇는 봉사의 길
부부의 섬김 정신은 외동딸 김미경 씨에게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김 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미중서부 황해도민회 제19대 회장, 이북도민연합회장, 민주평통 활동 등 한인사회의 주역으로서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김 회장은 “딸이 내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다”며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짐을 져서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하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그 염려 속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유산이 담겨 있다. 그것은 재산이나 명예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며, 고향을 잃은 사람이 또 다른 실향민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는 나눔의 정신이다.
◇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기를…”
김 회장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후세대가 이민 1세대의 삶과 한국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는 “우리 세대는 눈물 없이는 말하기 어려운 역경을 통과했다”며 “전쟁과 피란, 가난을 겪었고, 미국에서도 쉬운 일이 하나 없었지만 오직 믿음 하나로 오늘날의 터전을 일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고생스러운 세월을 다음 세대가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젊은 세대가 6·25전쟁이나 실향민의 아픔을 잘 모르는 현실은 그에게 못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다행히 그의 손녀는 할아버지 고(故) 김창극 장로의 무릎 위에서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그 아픔에 동감하지만, 대다수의 2·3세대에게 분단과 피란의 역사는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김 회장은 “비록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뿌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후배들이 대한민국이 통과해 온 피눈물 나는 역사를 바로 읽고 가슴속 깊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시카고 동포사회가 반목하지 않고 단합하는 일에 젊은 후배들이 앞장서서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가 걸어온 90여 년은 한 개인의 인생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자 시카고 한인 이민사 그 자체다. 김 회장은 그 격동의 시간을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힘들었지만 믿음으로 견뎠고, 살아남았으니 이웃을 도와야 했다고 담담히 말할 뿐이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었던 황해도의 어린 소녀는 세월이 흘러 시카고에서 탈북민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이민자들의 길을 열어주는 동포사회의 큰 어른이 되었다. 그는 “우리가 한 고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후세들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아야 한다”며 “한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잊지 말고, 믿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라”는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잃어버린 고향을 마음에 품고, 낯선 땅 시카고에서 외롭고 지친 이들의 손을 잡아준 삶. 김주진 회장이 남긴 흔적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을 붙들고 공동체를 세운 믿음의 기록으로 남았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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