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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ly 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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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26. 김왕기 WIN미디어그룹(시카고한국일보·MCTV·WIN-TV)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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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기 WIN미디어그룹(시카고한국일보·MCTV·WIN-TV) 회장.

죽음 앞에서 세운 소명… 미디어로 청년과 공동체를 지키다
벨연구소·록크웰 연구원 거쳐 첨단 IT 사업가로 성공
뇌막염 투병 후 예향문화센터 설립, 청년 문화사역 15년
영화 ‘선물’ 제작, 청소년 마약 중독 문제 알리고 재활에 힘써…
MCTV·WIN-TV 개척, 2022년 시카고 한국일보 인수
AI 전환·젊은 한인 정치인 육성으로 이어가는 마지막 비전

[편집자주] 본보는 한인 이민사의 현장을 지나온 원로들의 삶을 기록하는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기획을 연재해 왔다. 이번 연재의 마지막 주인공은 청년 문화사역을 펼치고 한인 미디어의 기반을 넓혀온 WIN미디어그룹 김왕기 회장이다. 죽음의 고비에서 드린 약속은 예향문화센터 설립을 시작으로 MCTV와 WIN-TV 창립, 시카고 한국일보 인수로 이어졌다. 김 회장은 재미대한체육회와 국가조찬기도회,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세계한인방송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청년과 공동체를 위해 쉼 없이 달려오며 시카고 한인사회의 공론장을 지켜온 김 회장의 이민 여정을 돌아본다.

지난 6월 19일 WIN-TV(Ch 24.1) ‘생방송 시카고 지금’에 출연한 김왕기 회장이 미주 한인 언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생사의 갈림길에서 시작된 사명

하와이 포상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1991년, 응급 입원한 김왕기 회장에게 내려진 진단은 뇌막염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사흘 동안 의료진은 감염 원인에 따라 생명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좋은 직장과 높은 수입, 좋은 집, 고급 승용차와 해외여행을 누리던 30대 젊은 사업가는 처음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나온 삶을 돌아봤다.

김 회장은 “교회는 다녔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니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며 “돈을 벌어 마음대로 썼던 일들이 온통 후회로 밀려왔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능력과 재물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신다면 남은 삶을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쓰겠습니다.”

사흘 후 치료 가능한 바이러스성으로 판명돼 생명을 건졌지만, 병원 문을 나선 그는 이전의 김왕기가 아니었다. 잘나가던 사업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유학생과 방황하는 청년들을 찾아 나섰다. 그 결심은 예향문화센터가 됐고, 연극과 찬양, 영화로 결실을 맺었으며 방송 전파와 신문의 활자로 이어졌다. 그에게 미디어는 사업에 앞서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였다.

예향문화센터가 마련한 ‘가스펠과 재즈 콘서트’ 공연 현장.

◇ 새벽예배로 심어진 신앙의 뿌리

김 회장은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외증조부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이어온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신앙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은 외할머니 김남수 권사였다.

김 회장은 “외가댁에 갈 때마다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어린 나를 깨워 함께 예배를 드렸다”며 “평생 내 삶을 붙들어준 단단한 신앙의 뿌리가 바로 그 새벽 시간에 심어졌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며 당시 대구에서도 손꼽힐 만큼 유복한 환경을 일궜다.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을 거쳐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유도대학 1기 졸업생이었던 부친은 학교가 재정 위기에 놓였을 때 백지수표를 내놓으며 용인대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대구제2교회 건축에도 건축위원장으로 깊이 헌신했다.

부모님은 늘 나눔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친구와 나눠 먹으라며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었고, 가난한 학생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 3대가 함께한 가족사진.

김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과 합창,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기획력도 일찍부터 남달랐다. 계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대구 근교 장터에서 공연을 열고, 다방 같은 장소를 빌려 남녀 고등학생들을 모아 행사를 직접 추진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부친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며 집안 형편은 급격히 기울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누나를 제외하고 김 회장과 동생들은 친척 집으로 흩어져야 했다. 미국 이모 집에 머물던 외할머니 김남수 권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해 손주들을 한데 모아 돌봤다.

외할머니는 어김없이 새벽 이른 시간에 손주들의 손을 잡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했다. 이후 부친이 빚을 모두 청산하자 외할머니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가족은 서울 상도동에 새 터전을 잡았다.

1977년 나이아가라폭포를 찾은 할머니 김남수 권사와 김 회장.

◇ 인생의 방향을 잡아준 사람

가족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던 무렵, 김 회장 역시 자신의 앞날을 결정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며 항공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부친의 강한 권유에 따라 용인대 유도학과에 진학했다. 1년 뒤 동기들이 수도경비사로 단체 입대할 때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로 입학했으나,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길이 열려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60년대 뉴욕에 정착한 이모의 초청을 계기로 가족은 차례로 미국으로 건너왔고, 이후 시카고에 자리 잡았다. 가장 늦게까지 한국에 남아 있던 김 회장도 1976년 12월 마침내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 직후 금속도금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디브라이대학교(DeVry University) 전자공학과에 진학했으나 누나의 과일가게를 돕기 위해 한동안 학업을 중단했다.

이때 평생의 동반자인 김쥬디 권사를 만났다. 김 권사는 “대학을 마쳐야 결혼하겠다”고 했고,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김 회장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아내가 늘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었다”고 말했다.

결혼식을 마친 뒤 아내 김쥬디 권사와 함께한 순간.

◇ 기술로 연 성공의 길

결혼 후 그는 밤에는 통신회사 GTE에서 일하고, 낮에는 학업을 이어갔다. 대학을 먼저 졸업한 아내 김쥬디 권사가 벨연구소에 입사해 인연을 맺으면서 남편의 GTE 경력을 소개했고, 이는 김 회장에게도 면접 기회로 이어졌다.

1982년 디브라이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같은 해 벨연구소 연구원으로 정식 입사했다. 회사의 전액 지원으로 드폴대학교 대학원(DePaul University)에서 컴퓨터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전화 시스템의 핵심인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연동 시스템 개발에 참여했다.

1982년 디브라이대학교 졸업식 당시 김 회장.

김 회장은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들이 몰리는 곳이라 학력만으로는 들어가기 어려웠다”며 “결혼한 상태에서 풀타임 근무와 학업을 병행한 성실함과 특히 경쟁사인 GTE에서의 경력을 회사가 높이 평가해준 덕분”이라고 돌아봤다.

1986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항공우주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록크웰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교회 지인의 부탁으로 금전등록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통신보드와 재고관리 시스템을 개발해준 것이 개인 사업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유명 핫도그 체인 포틸로스(Portillo’s)의 판매·재고관리 시스템과 국제적인 컴퓨터그래픽 컨벤션 등록 시스템 등을 연달아 개발했다.

큰 프로젝트들을 맡으며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기술자와 사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절정의 순간, 뜻밖의 뇌막염이 찾아왔다.

예향문화센터의 ‘스크루지 놀부’ 공연을 마친 뒤 출연진과 함께한 기념사진.

◇ 성공을 내려놓고 ‘예수의 향기’로

사흘 넘게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병상에 누운 그는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지난날을 눈물로 회개했다.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남은 인생을 방황하는 청소년과 유학생을 선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치겠다”고 간절히 기도했고,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 회장은 1994년 잘나가던 사업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예향문화센터’를 세웠다. ‘예향’은 ‘예수의 향기’라는 뜻이었다. 그는 1994년 1월부터 2008년 9월까지 낯선 타국에서 방황하는 유학생과 청년들을 위한 문화사역을 펼쳤다.

그는 찬양팀과 연극팀, 워십댄스팀을 조직하고 문화캠프와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의 찬양사역자와 공연팀을 초청해 미주 순회공연을 연결하는 등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문화사역을 펼쳤다.

김 회장은 “집 안이 예향 청년들과 방문 사역자들로 가득 차는 날이 일상이었다”며 “직장생활과 네 자녀의 육아를 병행하던 아내는 불평 한 번 없이 이들을 위해 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 청년들 중에는 목회자와 찬양사역자가 된 이들도 있었다.

사역비는 전적으로 스스로 벌어 충당했다. 전자부품 무역과 초기 휴대전화 딜러 사업에 뛰어들어 프라임코, AT&T, 모토로라 등의 딜러 자격을 확보하며 자금을 마련했다.

영화 ‘선물’의 포스터와 DVD.

◇ 영화 ‘선물’, 250개 교회에 던진 경고

2000년대 들어 김 회장은 이민가정 자녀들의 마약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LA 나눔선교회를 찾아가 재활 현장과 상담 방법을 배운 뒤 예향에 상담 창구를 마련하고 전문 재활기관과 연결했다. 부모와 교회가 체면 때문에 문제를 감추는 동안 치료 시기를 놓치는 현실을 알리기 위해 다큐멘터리와 연극을 거쳐 장편영화 ‘선물’을 제작했다.

2005년 완성된 ‘선물’은 실제 청소년의 마약 중독과 재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김 회장이 제작과 기획을 맡고 김형협 감독이 연출했으며,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최초의 디지털 HD 방식의 장편 영화였다. 극장 상영을 거쳐 미국과 한국의 약 250개 교회와 단체에서 상영됐고, 상영 후에는 부모들의 상담이 이어졌다. 한국 상영 현장에서 김 회장은 “외국문화의 무분별한 유입 속에서 한국 역시 머지않아 마약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화 ‘선물’의 시카고 개봉 당시, 상영을 기다리며 극장 앞을 가득 메운 한인 관객들.

‘선물’은 영화에 참여한 젊은 인재들에게도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배우와 제작진 가운데 여러 명이 이후 할리우드와 한국의 영화·방송계로 진출했다. 연출을 맡았던 김형협 감독은 한국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2025년 영화 ‘신의 악단’으로 150만 관객을 불러 모아 깊은 울림을 전했다.

당시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아덴 조(Arden Cho)는 훗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주인공 루미의 목소리를 맡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김 회장은 “청소년의 회복을 위해 만든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메시지가 되고, 또 다른 청년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 무대가 됐다”고 말했다.

2015년과 2017년 WINTV가 한국 연예인 야구단을 초청해 개최한 한미 친선경기와 문화공연 포스터.

◇ 방송을 살린 아내의 35년

김 회장은 두 차례나 문을 닫았던 시카고 기독교TV와 인연이 닿았다. 2004년경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방송 장비를 인수했다. 예향에서 함께 일하던 박경자 간사가 시카고 기독교TV PD와 한국 SBS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TV 방송 사역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30분~1시간씩 방송시간을 빌려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이후 미국 TV 방송의 디지털 전환기를 맞아 MCTV를 24시간 기독교 공중파 방송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광고와 후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송 규모가 커지면서 운영비와 재정 부담도 함께 늘었다. 다시 어려움에 놓인 방송국에 길을 열어준 사람은 아내 김쥬디 권사였다. AT&T 벨연구소에서 35년간 근무한 김 권사는 퇴직 당시 평생연금 대신 약 100만 달러 이상의 일시금을 선택해 방송국 운영 자금으로 내놓았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희범 조직위원장과 함께 한 김 회장.

마침 이때 개국한 지 1년 만에 큰 재정적 손실을 본 시카고 MBC 운영자가 인수를 제안해 왔다. 김 회장은 일반 방송의 수익으로 기독교 방송을 지탱하는 것도 사역을 이어가는 방법이라고 판단해 인수를 결정했다. 이후 미디어 환경 변화에 맞춰 MBN, MBC 등 다양한 콘텐츠와 자체 프로그램을 아우르는 시카고 지역 한국어 종합 공중파 방송 WIN-TV가 완성됐다.

중학생 때 미국에 온 1.5세인 김 권사는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의 문화와 정서를 두루 이해하고 있었다. 퇴직 후 방송국에 정식으로 합류한 김 권사는 오랜 직장생활에서 쌓은 고객 관리와 마케팅 경험을 바탕으로 맥도날드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도요타 등 대기업 광고를 잇달아 유치하며 방송국의 재정 기반을 다졌다. 아내의 헌신이 더해지면서 MCTV는 위기를 넘겼고, WIN-TV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헌정회 이철승 회장과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가졌다.

김 회장은 “돌이켜보면 아내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 같다”며 미안함과 깊은 감사를 전했다. 김 권사는 직장생활과 네 자녀의 양육을 감당하면서도 청년과 사역자들을 돌봤고, 은퇴 뒤에는 풀타임으로 남편의 일을 도왔다. 오늘의 WIN미디어그룹은 남편의 소명을 자신의 소명처럼 품고 묵묵히 곁을 지킨 아내와 함께 일궈낸 결실이었다.

이어 2022년에는 전임 회장의 은퇴를 계기로 시카고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종이신문의 세가 기울고 제작비는 치솟던 시기였지만, 반세기 넘게 시카고 한인사회의 역사를 기록해온 활자 매체의 가치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 일본계 미국인 혼다 연방하원의원과 함께한 김 회장.

◇ 언론이 살아야 한인사회가 산다

김 회장은 미주 한인의 정체성과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힘을 쏟았다.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로 세계한인기독교방송협회 대상을 받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소녀상, 재미이산가족 상봉운동, 한·미·북한 출신 청년들의 정체성, 한국전쟁 추모의 벽 등을 다룬 작품을 잇달아 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없다”며 “카메라는 사라지기 전에 사람과 역사를 붙잡아두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사진 11.
2013년 인천에서 열린 제94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선수단과 함께한 기념사진.

리더십은 체육계에서도 발휘됐다. 2012년 재미대한체육회는 세 협회로 나뉘어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고, 대한체육회는 어느 한쪽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주 선수들이 전국체전에 참가하지 못하는 파행이 이어졌다.

2012년 3월 수석부회장 겸 사무처장을 맡은 김 회장은 밤을 새워 한국 관계자들과 연락하고 미국 전역의 체육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한 달간의 기간을 둔 뒤 정회원들이 가장 많이 참여한 조직을 공식 단체로 인정하자는 방안을 대한체육회에 제시했고, 결국 세 조직은 하나로 통합됐다. 이후 2013년 제94회 인천 전국체전 미국선수단장으로 선수들을 이끌었다.

미주 국가조찬기도회 시카고지회 회장 재임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및 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 왼쪽 첫 번째가 김왕기 회장이다.

리더십의 비결을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집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 하나를 그 일에 그냥 던지는 겁니다.”

김 회장은 재미대한체육회와 국가조찬기도회,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세계한인방송협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과 미국 대통령 평생봉사상 등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가 가장 강조하는 가치는 ‘한인 언론의 생존’이다.

수많은 한인 매체가 생겼다가 사라진 현실을 안타까워한 김 회장은 “한인 언론은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 아니다”라며 “언론이 무너지면 한인사회의 목소리와 역사를 기록할 주체가 없어진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론을 한인회나 문화원처럼 한인 커뮤니티 전체가 함께 지켜야 할 ‘공공자산’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한인사회가 지역 언론을 단순한 광고매체가 아닌 공동체의 기록자이자 감시자로 귀하게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기에 있다.

김 회장 부부와 1남 3녀가 함께한 가족사진. 장남 김성헌(John Kim) 목사는 목회자로, 장녀 세라 씨는 책 표지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차녀 제니 씨는 뉴질랜드에서 도서관 전문직으로, 삼녀 레베카 씨는 시카고 베어스 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김 회장 부부는 네 자녀 아래 여덟 손주를 두고 있다.

◇ 마지막도 다시 청년을 향해

지금 미주 한인 미디어는 재정과 기술이라는 두 개의 언덕을 동시에 넘어야 한다. 한국어 독자는 줄고 광고시장은 작아졌다. 반면 인공지능(AI)은 번역과 광고 녹음, 기사와 영상 제작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컴퓨터 연구원 출신인 김 회장은 AI를 위기로만 보지 않는다. 앞으로 3~4년 동안 디지털·AI 기반과 재정 구조를 정비해 미디어그룹을 젊은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이 그의 목표다.

김왕기 회장이 청년·문화·방송사역과 신앙의 여정을 담아 펴낸 저서들. 왼쪽부터 ‘총칼 없는 전쟁, 문화사역 이야기’, ‘문화@ 23시 55분’, ‘영성의 힘’.

은퇴 이후에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특히 한인 2세와 3세가 주류 정치권에 진출해 한인사회를 대변할 수 있도록 언론이 발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 회장은 청년들과 발로 뛰며 함께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먼저 이야기했다. 예향 청년사역에 전념하던 시절에는 공연과 집회, 강연, 상담 현장을 쉴 새 없이 찾아다녀 “시카고에서 김왕기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지금은 사무실 안에서 신문과 방송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지며 동포사회에서 조금씩 잊히는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동포사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 뚝심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특히 신앙에 기초한 청년사역과 문화사역에 전심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언론과 문화예술, 체육, 신앙 및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걸어온 시간을 보여주는 상패와 감사패. 수많은 상에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이어온 헌신의 세월이 담겨 있다.

죽음 앞에서 드린 한 청년의 약속은 성경공부와 찬양, 연극을 거쳐 영화가 됐고, 방송의 전파와 신문의 활자가 됐다. 시대와 매체는 달라졌지만, 사람을 살리고 다음 세대를 세우겠다는 그의 마음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디지털과 AI라는 거센 변화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다음 장면과 문장을 준비하고 있다.

청년을 향해 시작해 다시 청년을 향하려는 김왕기 회장의 발걸음은 시카고 한인사에 공동체를 지켜낸 한 개척자의 이정표로 새겨지고 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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