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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ly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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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개척자들] 23. 김숙영 예울림여성합창단 이사장·전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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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영 예울림여성합창단 이사장·전 단장.

“내 일생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
1975년 도미, 세탁업과 부동산업으로 이민 삶의 기반 다져
예울림여성합창단 21년 이끌며 찬양과 나눔 이어와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후 모교서 13년간 국어교사로 헌신
한글학교·세계기도일·문서선교로 다음 세대와 이웃 섬겨

[편집자주] 본보는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틀을 다진 1세대 한인들의 삶을 기록하는 연재 기획 ‘시카고 한인 개척자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인물은 예울림여성합창단을 21년간 이끌며 찬양과 봉사를 이어온 김숙영 예울림여성합창단 이사장(전 단장)이다. 김 이사장은 베다니 한국학교 초대 교장으로 차세대 한글교육에 힘썼고, 한인교회여성연합회 전 회장으로 세계기도일 사역을 이어왔으며, 천국열쇠선교센터 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 재소자들을 위한 문서선교에도 동참해왔다. 그의 삶은 교사와 이민자, 어머니와 신앙인, 봉사자의 자리를 묵묵히 걸어온 시카고 한인 1세대 여성의 기록이다.

2024년 예울림여성합창단 정기연주회 무대. 김 이사장은 21년간 합창단을 이끌며 찬양과 나눔의 사역을 이어왔다.

◇ 찬양은 그의 자리였다

김숙영 예울림여성합창단 이사장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 줄기처럼 이어지는 소리가 있다. 바로 ‘찬양’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 등에 업혀 교회로 향하던 길에서부터 시카고의 예배당 성가대석, 그리고 예울림여성합창단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 곁에는 늘 찬양이 있었다.

김 이사장은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어린 시절, 신앙이 깊었던 할머니는 전등도 없던 밤길을 걸어 수요예배에 나갔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등에 업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당으로 향했다. 김 이사장에게 신앙과 찬양은 그렇게 어린 기억 속에 먼저 자리 잡았다.

미국에 와서도 그의 신앙생활 중심에는 늘 찬양이 있었다. 여고 시절부터 어느 교회를 가든 성가대석을 지켜온 그였다. 그렇기에 찬양의 자리는 가장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당연한 삶의 일부분이었다.

김 이사장은 “내 신앙을 남에게 자랑하듯 거창하게 말할 능력은 없다”면서도 “다만 어디를 가든 늘 성가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것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찾아가야 할 내 자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그 길은 훗날 예울림여성합창단으로 이어졌다. 김 이사장은 1997년 테니스를 함께 치던 친구의 권유로 예울림에 합류했다. 이후 2003년부터 단장직을 맡아 21년간 합창단을 이끌었다.

예울림여성합창단 정기연주회 무대.

그에게 예울림은 단순한 합창단이 아니었다. 예쁜 음성의 울림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울림을 다시 이웃을 향한 나눔으로 이어가는 신앙 공동체였다.

김 이사장은 “예울림이라는 이름이 참 좋다”며 “예수님을 찬양으로 세상에 울려 전하고, 예쁜 음성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오랜 세월 찬양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바탕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신앙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웃음

김 이사장의 유년 시절은 평안북도에서 시작됐다. 신의주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직자였던 아버지는 급변하는 정세를 읽고 먼저 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이후 어머니가 자녀들을 데리고 뒤따르며 가족은 다시 한곳에 모였다.

김 이사장은 “어린 나이에 해방과 전쟁, 피란을 연이어 겪었지만, 부모님 품에 안겨 다녔으니 그게 고생인 줄도 몰랐다”며 “무섭기는 했어도 ‘이게 힘들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은 또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충청도의 한 시골 마을로 대피했다가 인천으로 돌아왔으나, 전세가 급박해지자 결국 부산까지 향했다. 당시 두 번째 피란길에서 거대한 군함을 타고 이동했던 기억은 어린 마음에도 깊은 잔상으로 남아 있다.

1959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김 이사장.

힘겨운 시대였지만, 김 이사장은 어린 시절을 어둡게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본래 웃음이 많았고, 집안 분위기를 살필 줄 아는 사려 깊은 아이였다. 가끔 부모님 사이에 언성이 높아질 기미가 보이면 슬그머니 가운데 앉아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김 이사장은 “누가 중간에서 나쁜 말을 하면, 나는 좋은 말로 부드럽게 바꿔 양쪽에 전하곤 했다”며 “부모님께서 그런 나를 참 기특해하고 예뻐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 성품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화가 난다고 그걸 붙잡고 오래 가봐야 내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속이 없어서가 아니라, 언제나 웃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 긍정의 성정은 훗날 낯선 미국 땅에서 맞닥뜨릴 이민 생활의 고비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단단한 힘이 됐다.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사진.

◇ 시카고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

인천에서 성장한 김 이사장은 장로교 미션 계통의 인성여자중학교와 인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그의 마음은 이화여대로 향했다. 고교 시절 만난 이화여대 출신 선생님들의 세련되고 지적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법대 진학도 고민했으나 결국 국문과를 선택했다.

대학 생활은 낭만보다 치열함에 가까웠다. 인천에서 신촌까지 매일 통학해야 했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늘 귀가 시간을 의식해야 했다.

졸업 무렵,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한국일보 견습기자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여성 기자라는 직업은 거친 현장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아버지는 제가 안정적인 교단에 서기를 바라셨다”며 “결국 그 뜻을 따라 교사의 길을 택했다”고 전했다.

1963년 봄, 그는 모교인 인성여자중·고등학교로 돌아가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미국으로 오기 전까지 1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때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시카고에서 다시 만났다. 이민지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은 저마다의 삶을 일구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이제 제자들도 어느덧 70대가 됐다”며 “만나면 사제지간이라는 격식보다는,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게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모교인 인성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들과 함께한 김숙영 이사장.

◇ 달빛 아래 백향목 길, ‘6월에 만난 사람’

김 이사장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1962년 6월 22일에 찾아왔다. 그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첫 만남을 기억하며 ‘6월에 만난 사람’이라는 수필을 남기기도 했다. <6월 26일자 A14 다시보기>

당시 대학 4학년이던 그는 연세대 초입에 살던 언니 집을 방문했다. 언니는 갓난아기를 재워두고 잠시 미장원에 다녀오겠다며 동생에게 조카를 맡겼다. 하지만 언니가 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김 이사장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언니와 같은 집에서 하숙하던 청년이 나오더니 능숙하게 아이를 안아 달랬다.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든 이 청년이 바로 훗날의 남편, 김인도 안수집사였다.

저녁을 먹은 뒤 언니는 연세대 법대생이던 그에게 캠퍼스를 구경시켜 달라며 함께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평소 백향목 길을 걸어보고 싶었던 김 이사장은 동의했고, 세 사람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언니는 곧 형부의 저녁상 준비를 핑계로 자리를 비웠고, 두 사람은 달빛 아래 연세대 교정을 함께 걸었다.

김 이사장은 “달빛 아래 함께 걷던 그의 모습이 참 바르고 선해 보였다”며 당시 첫인상을 회상했다. 여름날 밤의 인연은 자연스레 이어져 1965년 화촉을 밝혔고,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김 이사장은 “신앙 안에서 진지하게 만남을 이어가다 자연스럽게 결혼에 이르게 됐다”며 “지나고 보니 그 여름밤의 달빛 산책이 우리 부부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1965년 결혼식 당시 김숙영 이사장 부부. 두 사람은 평생 신앙과 삶의 비전을 함께 나눈 든든한 동반자였다.

◇ 생업의 자리에서 배운 성실함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교사 생활을 하던 김 이사장에게 미국 이민은 처음부터 계획된 선택이 아니었다. 같은 학교의 한 교사가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당시 미국 교육은 한국보다 100년 앞섰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남편의 누나가 미국에 살고 있었기에, 김 이사장은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도 미국에 갈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막연했던 문의는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됐다. 초청 서류가 오고 인터뷰가 통과되면서 이민 절차가 빠르게 진행됐다. 막상 허가가 나자 두려움도 생겨 한 차례 출국을 미뤘지만, 그는 결국 미국행을 결심했다.

1975년 1월 24일, 김 이사장 가족은 한국을 떠났다. 출국 당일 오전까지 학교에서 근무한 뒤 밤 비행기에 올랐고,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의 동생 집과 오하이오의 누님 집을 거쳐 1975년 2월 시카고에 정착했다. 당시 세 자녀는 일곱 살, 다섯 살, 두 살 반이었다.

초기 이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공장에 취직한 남편이 얼마 못 가 허리를 다치면서 생계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때 기적 같은 인연이 이어졌다. 자녀들의 입학을 위해 치과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치과의사가 김 이사장을 알아본 듯했다. 알고 보니 그의 여동생이 인성여중고 시절 김 이사장의 제자였다. 치과의사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교인을 소개해줬고, 부부는 세탁업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김 이사장 부부는 작은 드롭오프 세탁소를 시작으로 세탁공장과 빌딩이 딸린 대형 세탁소까지 차례로 운영하며 이민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

한국에서는 세탁소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다. 그는 “싫은 게 어디 있느냐”며 “해야 하니까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 어려웠던 것은 영어보다 바느질이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가 단추까지 달아줬다. 그런데 미국 세탁소에서는 직접 바지를 줄이고, 지퍼를 달고, 수선을 해야 했다. 손가락을 찔리고, 삐뚤게 단 지퍼를 뜯어 다시 달았다. 그는 “처음에는 고생을 좀 했다”며 “그래도 6개월쯤 하니까 손에 익더라”고 말했다.

당시 시카고 세탁업계에는 유대인들이 체인 형태로 운영하던 대형 세탁공장과 드롭오프 가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운영 부담이 커지면서 매물로 나오는 곳도 적지 않았다. 김 이사장은 “그때는 세탁소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며 “우리 부부는 그 틈에서 기회를 찾았다”고 설명했다. 부부는 작은 드롭오프 세탁소로 시작해 세탁공장, 빌딩이 딸린 대형 세탁소까지 차례로 인수하며 이민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

2000년 교회 가족찬양대회에서 세 자녀와 함께한 김 이사장 부부.

1980년에는 시민권을 취득해 링컨우드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고, 1999년 세탁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약 25년간 사업을 이어갔다. 부부는 이후 약간의 부동산 수입으로 생활하면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다. 그렇게 일군 삶의 기반은 훗날 교회와 공동체를 섬기는 원동력이 됐고, 자연스레 찬양과 봉사의 삶으로 이어졌다.

◇ 예울림, 예쁜 울림으로 전한 복음

김 이사장이 예울림여성합창단에 합류한 것은 1997년, 함께 테니스를 치던 친구의 권유가 계기였다. 노래를 좋아하고 찬양을 삶의 자리로 여겼던 그에게 예울림은 자연스럽게 다가온 또 하나의 사명이었다.

김 이사장은 2003년부터 단장직을 맡아 중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총 21년간 합창단을 지켜오다 2026년 2월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오랫동안 단장을 맡은 이유에 대해 그는 단원들의 신뢰를 먼저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단원들이 늘 신뢰로 붙잡아 줬다”며 “비교적 일찍 은퇴해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한 해 한 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예울림의 분위기다. 김 이사장은 “여러 사람이 모였음에도 창단 이래 큰 불협화음이나 갈라짐 없이 아름다운 분위기를 이어온 것이 예울림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2025년 예울림여성합창단 단원들과 함께한 김숙영 이사장(사진 오른쪽). 김 이사장은 예울림의 가장 큰 자랑으로 창단 이래 이어져 온 아름다운 분위기와 단원들의 화합을 꼽았다.

예울림은 매년 정기연주회를 열고, 연주회 때 모인 헌금을 선교기관과 기독교 단체, 도움이 필요한 개인과 기관에 전달해 왔다. 부족하면 단원들이 보태기도 했다. 지금까지 예울림이 후원한 곳은 28곳에 이른다.

또한 예울림은 장로선교회가 주최하는 연합합창제에도 매년 참여해왔다. 여러 기독합창단이 함께 찬양하고, 그 수익을 필요한 기관에 전달하는 행사다. 교회와 기독교 방송국, 지역 행사에 초청받는 일도 많았다.

김 이사장은 “예울림은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 마음을 필요한 곳에 나누는 단체”라며 “그래서 더 귀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예울림여성합창단은 매년 정기연주회를 열고, 연주회 때 모인 헌금을 도움이 필요한 개인과 기관에 전달해 왔다. 사진은 시카고지역한인교회편찬위원회에 성금을 전달하는 모습.

◇ 이웃을 향한 나눔과 헌신의 삶

김 이사장의 봉사는 예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국어 교사 경력을 바탕으로 1975년 이민 초기 YMCA 한국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활동했던 그는, 40년 후인 2016년 ‘베다니 한국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아 차세대 한글 및 역사·문화 교육에 헌신했다.

박해달 장로의 주도와 정종진 장로 등의 후원으로 문을 연 베다니 한국학교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무료 학교였다. 김 이사장은 “처음에는 교장직을 사양했지만, 이민 가정의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은 이민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며 “복음과 모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토요일마다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문화를 가르쳤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교는 안타깝게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휴교에 들어갔고, 이후 여러 여건상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김 이사장은 “차세대 교육의 장이 멈추게 된 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덧붙였다.

김숙영 이사장은 2016년 베다니 한국학교 초대 교장을 맡아 차세대 한글 및 역사·문화 교육에 힘썼다. 베다니 한국학교는 박해달 장로의 주도와 정종진 장로 등의 후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수업료와 점심비, 교재비를 받지 않는 무료 학교로 운영됐다.

한인교회여성연합회 활동도 오래 해왔다. 이 단체의 주요 사역은 매년 3월 첫째 금요일 열리는 세계기도일 예배다. 1887년 미국 장로교 여성들의 기도 모임에서 시작된 ‘세계기도일’은 현재 180여 개국이 동참하는 세계적인 기도 운동이다. 각 나라 여성들이 작성한 기도문을 바탕으로 전 세계 교회 여성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사역이다.

김 이사장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간 한인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현재는 세계기도일 예배를 위해 나뉜 시카고 5개 지역 중 시카고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기도일 예배에 참석한 김 이사장의 모습. 김 이사장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한인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세계기도일 예배를 위한 시카고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인교회여성연합회에는 세계기도일 헌금과 별도로 ‘작은 돈 헌금’ 사역도 있다. 이름처럼 작은 정성을 모아 시카고 지역의 기독교 단체와 선교사, 도움이 필요한 기관을 지원하는 사역이다. 해마다 약 9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가 모이고, 신청 기관에 200달러, 500달러씩 나눠 지원한다.

김 이사장은 “큰돈은 아니지만 필요한 곳에는 귀한 도움이 된다”며 “작은 돈이 모여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이 된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 봉사상을 받았다. 사진 왼쪽 두 번째가 김 이사장.

천국열쇠선교센터 활동도 이어왔다. 이 단체는 미주 한인 재소자들을 위한 문서선교 기관이다. 김 이사장은 약 15년 동안 이 사역에 참여했고,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이사장으로 섬겼다. 천국열쇠선교센터는 매주 230통에서 300통가량의 편지를 영어와 한국어로 보내며 재소자들에게 위로와 복음을 전한다.

김 이사장은 “이러한 선교센터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며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편지 한 통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김 이사장은 그간의 공로로 2014년 한인사회 봉사상을 받았고, 2022년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 봉사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수상 이력보다 하루하루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해 온 삶이었다.

김 이사장은 “돌아보면 숱한 위기와 고비가 있었지만, 힘들 때마다 기도로 마음을 다스렸다”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부부는 불평하면 안 된다”며 “세 자녀와 일곱 명의 손주도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고, 여기까지 온 모든 여정이 그저 감사”라고 덧붙였다.

2025년 11월 8일자 주간한국 커버 <다시보기>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거창한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삶이라는 점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꼭 거창하고 큰일을 해야만 사회와 나라를 위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맡겨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김숙영 이사장의 발자취는 화려한 무대보다 묵묵한 자리에서 더 깊어졌다. 한국에서 시카고까지, 그는 늘 자신이 선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찬양으로 하루를 보내고,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며,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어 온 그의 삶은 한 이민 1세대 여성의 조용한 고백으로 남는다.

“내가 산 일생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윤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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